‘정의’에 대한 고민과 성찰들
9월 5, 2010 by admin
Filed under Column, 名士가 읽은 책과 세상
글 | 김광웅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좋은책선정위원회 위원장 | 名士가 읽은 책과 세상
《정의란 무엇인가》
‘정의’에 대한 고민과 성찰들
우리는 항상 문제를 안고 산다. 문제를 보는 눈도 여럿이다. 이념적 시각에 따라 문제 해석에 차이를 보인다. 또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천착하기보다 실증주의에 묻혀 본질보다는 표피에 익숙해 왔다. 이른바 수치화된 자료를 내세워 설득하기를 다반사로 했다. 그런데 1960년에 한 케네디 후보와 2008년에 한 오바마 후보의 연설은 색달랐다. 이들의 공통점은 공동체의 도덕성에 호소한 것이다. 보통은 모두가 행복하면 된다는 공리주의(utilitarianism)적 사고를 내세우거나, 개인의 자유가 우선해야 한다는 자유의지주의(libertarianism)인데 반해 이들은 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를 내세워 미덕(virtue)의 중요함을 일깨웠기 때문이다.
도덕적 딜레마에 매료된 하버드 대학생들
정의를 이해하는 기준으로 제시한 이들 세 가지를 놓고《정의란 무엇인가》는 역사상 인물들, 이른바 아리스토텔레스, 벤담, 밀, 칸트, 프리드먼, 롤스, 노직 등의 견해를 빌려 현실 문제의 본질을 파고든다. 이를 테면 인간은 자신을 소유하는가, 아닌가 라는 칸트의 이성론적 사고를 대입해 장기 매매의 부당성을 파헤치는 것과 같은 것이다. 1980년부터 30년간 하버드대에서 정치철학을 가르치고 있는 마이클 샌델 교수는 “개인의 성찰만으로 정의의 의미나 최선의 삶의 방식을 발견할 수 없다”(465쪽)며 공동체의식의 중요성을 책 모두에서부터 강조한다.
도덕적 사고란 혼자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럿이 함께 노력해 얻는 것이라는 믿음이 강하다. 그러기 위해 동굴의 안팎을 오가며 원칙과 상황도 익혀야 한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동굴 속에서는 벽에 비친 희미한 자신의 영상도 제대로 보지 못한다. 누구나 빠지는 도덕적 딜레마에 매년 천 명의 하버드 학생들이 매료될만 했다.
개인이나 정부는 복잡한 것은 피하고 편의를 쫓는 경향이 있다. 최소국가론도 그래서 설득력이 없지 않다. 자동차 안전벨트나 자전거 헬멧을 써야 한다거나 심지어 매춘과 동성애 같은 것조차 국가가 간섭하면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고까지 생각한다. 그러기에 대리모 출산이나 미국의 남북전쟁 때처럼 징집 대신 사람을 고용해 대신 출정하게 하는 것이 자유로운 선택으로 서로가 행복할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까지 정당하다고 우긴다. 그러나 “자유 시장에서 우리의 선택은 얼마나 자유로운가? 세상에는 시장에 존재하지 않는, 그리고 돈으로 살 수 없는 미덕과 고귀한 재화가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한 번쯤은 고민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하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저자의 입장은 공리주의를 거부하면서 사회계약에 기초한 정의를 강조한다. 중요한 것은 동기로 칸트의 입장을 대변한다. 도덕적 가치는 결과가 아니라 동기에 있고(157쪽) 이것은 또 원칙의 문제이기도 하다. 세종시 원안과 수정안을 놓고 맞선 후 원칙론이 승리한 예가 상기된다. 한국 정치에서도 정의의 숨결이 거칠어졌으면 좋겠다. 원칙론은 공적 삶의 핵심적 사고방식이라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양도할 수 없는 권리가 있다는 것에 찬성한다. 인간은 존중 받아야 할 존엄성을 지닌 이성적 존재로서 칸트를 옹호하는 이유는 그가 공리주의를 맹박하기 때문이다. 도덕이란 행복(원저에는 welfare) 극대화를 비롯한 어떤 목적과도 무관하고 도덕이란 인간 그 자체를 목적으로 여기고 존중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인간의 존엄성은 보편적 법칙을 따르는 능력에 달려 있고, 자율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자신을 존중하고,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자유행동이 도덕적 행동이고 이것이 곧 정언명령적 행동이라는 것이다. 흥미ㆍ바람ㆍ욕구ㆍ기호 같은 경험적 요소로 도덕이 좌우될 수 없다. 정의의 원칙도 마찬가지여서 공동체의 이익이나 욕구에 좌우될 수 없다. 최고의 도덕적 원칙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순수실천이성’을 연습하는 것이다(150쪽).
정의에 관한 이야기로 말하면 저자는 존 롤스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롤스의 사회계약은 “원초적으로 평등한 위치에서 이루어지는 가언합의”다.
합의만으로는 의무가 생기지 않고 자율과 호혜가 따라야 한다고 믿는다(203쪽). 저자는 타고난 우연과 사회적 우연을 대비시키며 “평등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능력위주 시장사회의 유일한 대안이라면 재능 있는 사람에게 불이익을 주어(납덩이 신발을 신게 하는 것과 같은) 강제로 평등을 달성하는 일뿐이라고…”하여 롤스를 비판한다. 특목고에 불이익을 주려는 이 나라 교육 정책가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대목이다. 한편 하버드 대학 입학을 놓고 노력이 혜택 받은 가정환경의 산물인지도 논의하고 있다.
정의에 관한 논쟁은 도덕의 문제
결국 누가 어떤 자격을 가졌는 가와 같은 의문을 파헤칠 때 당면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처럼 영광과 포상이 따르는 사회적 텔로스(telos, 목적)를 이해하는 것이다.
기여금 입학제로 고민하는 대학의 경우 대학의 텔로스 역시 학문의 우수성만 따지면 되는 것인지, 공적 이상까지 추구해야 하는 것인지 논의는 논의를 물고 한없이 전개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는 정의의 목적은 “어느 목적에도 치우치지 않는 권리의 틀을 정하는 게 아니라 좋은 시민을 양성하고 좋은 자질을 배양하는 것”이다(270쪽). 좋은 삶을 사는 법을 터득해야 하고 폴리스에서 살며 함께 고민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옳고 그름, 선과 악, 공정과 부정을 고민할 때 능력은 개발되는 것이라고 믿는다(275쪽). 아리스토텔레스가 특히 폴리스에서의 연찬을 강조하는 이유는 도덕적 미덕이라는 것은 습관의 결과로 생기고 예술처럼 연습해 행동으로 터득하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정의는 적합성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인가? 분배의 문제인가? 가치 측정의 문제인가? 골프 선수 중 장애자가 주장하는 대로 골프 카트를 타고 경기를 하게 한다면 이것이 공정성에 어긋나는 것일까? 그러나 골프라는 운동의 본질이 치는 것이지 걷는 게 아니라고 한다면 비록 카트를 타고 경기를 한들 규칙을 위반하는 것일까?
“정의와 권리에 관한 논쟁은 사회제도나 조직의 목적, 그것이 나누어 주는 재화, 그리고 영광과 포상을 안겨주는 미덕에 관한 논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법을 만들 때 이런 문제에 중립을 지키려고 노력하지만, 좋은 삶의 본질을 논하지 않고서는 공정성을 말하기가 불가능 해 보인다”(289쪽). 정의에 관한 논쟁은 어쩔 수 없이 본질적인 도덕의 문제로 이어진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을 칸트와 롤스가 거부하는 이유는 그가 자유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정의와 공동선의 관계
정의와 공동선은 어떤 관계인가? “구제금융이나 상이군인 훈장, 대리 출산이나 동성혼, 소수집단우대정책이나 군복무, 최고경영자의 임금이나 골프 카트 이용권을 두고 어떤 논란을 벌리든, 정의는 영관과 미덕, 자부심과 인정에 관한 대립하는 여러 개념과 밀접히 연관된다. 정의는 올바른 분배만의 문제는 아니다. 올바른 가치 측정의 문제라는 것이다.”(339쪽)
정의와 권리를 계산 문제로 전락시킬 수는 없는 일이다. 또한 인간 행위의 가치를 하나의 도량형으로 환산해 획일화 하며 질적 가치를 무시할 수는 없다. “정의로운 사회는 단순히 공리를 극대화하거나 선택의 자유를 확보하는 것만으로는 만들 수 없다. 좋은 삶의 의미를 함께 고민하고, 으레 생기게 마련인 이견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문화를 가꾸어야 한다”는 것이 샌델의 확고한 정의관이다.
“물질적 빈곤을 없애려고 아무리 노력한들 더 어려운 일이 따로 있습니다. 우리 모두를 괴롭히는 (…) 만족의 결핍에 맞서는 일입니다.”
케네디의 이 말이 정치는 도덕적이고 영적인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메시지로 대신할 수 있다. 케네디처럼 오바마도 추구한 공동선의 정치는 시민의 미덕부터 키우고(당신은 미국에 투자하고 미국은 당신에 투자하고…), 사회적 행위(대리모 출산, 장기 매매 등)를 시장에 맡겨 그 행위를 규정하는 규범이 타락하게 해서는 안되고, 재분배로 불평등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다지만 빈부격차가 지나치면 민주 시민에게 요구되는 연대의식이 약화되어 이를 방지해야 한다. ‘공동의 장’이 사라지면 부자 따로, 가난한 이 따로 되어 공동시민의식은 찾을 길이 없어질 지도 모른다. 시장에 매료된 보수주의자와 재분배에 주목하는 자유주의자들이 이런 손실을 간과하기 십상이라는 것이 저자의 신념이다. 그래서 공공기관과 공공서비스의 질을 높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고위 정책관료들이 꼭 봐야할 책
도덕적 이견에 좀 더 적극적으로 가담해 상호 존중하는 태도를 고양하고 서로 증오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일단 학습해 보자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정의의 문제를 여러 이론과 견해, 그리고 실제 문제를 놓고 파헤친 샌델의 업적은 두고두고 회자될 법 하다. 다만 그의 공동체주의에 문제가 없지 않다는 점은 지적해야 마땅하다. 즉, 그는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나 마이클 월저(Michael Walzer) 같은 공동체주의자인 것은 분명하지만 공동체가 선을 가리는 최종 중개자인 것에 선뜩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설득시키느냐의 문제가 남는다. 이런 이른바 문화 상대주의는 인권의 보편성에 관한 헌신과 양립하기 어려운 문제를 야기한다. 그래서 다음의 과제는 에지오니(Amitai Etzioni)의 지적대로 싱가폴 같은 동아시아의 완벽한 공동체주의와 호응적 또는 네오공동체주의와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는 입장을 전개하는 일이다. 결국 우리 공동체의 특수 가치와 보편적 인권에 대한 공여 간의 문제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이냐의 문제이다. 공리주의의 환상에 빠져있는 경제학도를 비롯해서 공공부분의 고위 정책관료들이 높은 수준의 커뮤니티를 구축하고 대국민 서비스의 질을 높이기 위해 이 책 보기는 필수 중의 필수다.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서울대학교 공공리더십센터 상임고문.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좋은책선정위원회 위원장. 서울대학교 법과대학과 동 행정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하와이 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장, 한국행정학회 회장, 한국공공정책학회 회장, 한국사회과학협의회장, 대통령 직속 초대 중앙인사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출판저널 20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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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지하철역에 작은 도서관 늘리자
8월 4, 2010 by ad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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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한상수 행복한아침독서 이사장 | 하루의 시작, 아침독서
아파트, 지하철역에 작은 도서관 늘리자
서울국제도서전 기간 중인 지난 5월 14일에 한국출판학회에서 주최한 출판정책 라운드 테이블에 토론자로 참석하였다. ‘국민독서, 어떻게 진흥시킬 것인가?’라는 주제로 열린 세미나는 나름대로 국민독서 진흥이라는 중차대한 문제에 대해 진지한 모색이 이루어진 자리였다. 토론자로서 필자는 작은 도서관 확충과 주민의 도서관 이용률을 높이는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두 가지 제시하였다.
첫 번째 방안은 지하철역과 기차역사 등 유동인구가 많은 곳에 작은 도서관을 설치하는 것이다. 지하철역과 기차역사에는 유휴공간이 많이 있어 작은 도서관을 만들기가 용이하고 비용도 적게 든다. 더 바람직한 것은 사람들의 동선에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도서관 이용률을 높일 수 있다는 점이다. 직장인들이 공공도서관을 이용하기란 쉽지 않다. 이런 직장인들에게 출퇴근 시간에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지하철역 도서관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도서관을 이용하지 못하는 시민들을 도서관으로 끌어들이는 유용한 방법이라 생각한다. 물론 이런 작은 도서관에 전담 사서를 두어 도서관 관리를 체계적으로 하는 것은 필수적인 일이다.
두 번째 방안은 공동주택단지 내 작은 도서관을 활성화하는 것이다. 국토해양부의「주택건설기준 등에 관한 규정」제55조 제5항을 보면 300세대 이상의 공동주택을 건설하는 주택단지에는「도서관법 시행령」별표 1의 기준(건물 면적 33 제곱미터 이상, 열람석 6석 이상, 도서관 자료 1,000권 이상)에 적합한 작은 도서관을 설치하여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이 규정에 따라 만들어진 작은 도서관이 전국적으로 수천 개에 달하지만 현재 제대로 운영되는 도서관은 극히 일부에 불과한 게 현실이다.
대부분 준공허가를 받기 위한 요식행위로 작은 도서관을 만들어 놓고 이후의 운영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공동주택단지 내 작은 도서관에 정부 예산을 들여 전문사서를 파견한다면 작은 도서관이 제 역할을 다할 수 있고, 정부가 역점을 들여 추진하는 일자리 창출에도 부합할 수 있다. 물론 아파트단지 주민들도 작은 도서관이 제대로 운영될 수 있도록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자원봉사도 적극적으로 하고, 아파트 관리비에 한 가구당 작은 도서관 운영지원비로 1,000원 정도를 부담하는 방식도 검토했으면 한다. 정부와 민간단체와 주민이 힘을 모은다면 작은 도서관 활성화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전국에 있는 공동주택단지 내 작은 도서관들이 제대로 운영된다면 우리나라의 독서문화는 획기적으로 개선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 길에 행복한아침독서가 독서운동 및 도서관 전문 사회적 기업으로서 담당할 수 있는 몫이 있다면 최선을 다해 노력할 것이다. 새로운 길을 만드는 데 선한 뜻을 가진 많은 이들이 손을 잡고 힘을 모았으면 하는 바람을 갖는다.
<출판저널 20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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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독서운동 5년, 함께 걸었던 행복한 여정
6월 15, 2010 by admin
Filed under Column, 하루의시작,아침독서
글 한상수 행복한아침독서 이사장 | 하루의 시작, 아침독서
아침독서운동 5년, 함께 걸었던 행복한 여정
아이들이 행복하게 책을 읽을 수 있기를 소망하며 시작한 아침독서운동이 어느덧 5주년을 맞았다. 더불어 아침독서운동을 알리기 위해 창간된 <아침독서신문>도 지령 50호를 맞이하였다. 아침독서운동을 시작하면서 이를 알릴 방법을 고심하다가 소박하게 만든 <아침독서신문>이 지령 50호를 맞이하니 감회가 새롭다. 2005년 3월 28일에 타블로이드판 4면으로 나온 <아침독서신문> 창간호는 ‘아이들의 행복한 책 읽기’라는 아침독서운동의 지향에 공감한 많은 후원자들의 정성어린 후원금으로 제작되었다. <아침독서신문> 창간호는 당시에 생소했던 아침독서운동을 알리는 데 역할을 톡톡히 했다. 발간되자마자 전국적으로 신청이 쇄도하여 독서정보지로는 드물게 추가 인쇄를 하기도 했다. 창간호는 총 7만 부를 찍었는데 서울국제도서전 등에서 배포되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실제로 <아침독서신문> 창간호를 통해 아침독서운동을 처음 알게 된 많은 교사들이 참여로 이어지는 사례가 많이 보고되었다.
초∙중등 구분 없이 계간으로 발간되던 <아침독서신문>은 3호부터 초등학교용과 중고등학교용을 별도로 발간하였고, 2006년부터 월간 발간 체제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2008년 8월에 영유아 독서정보지인 <책둥이>를 창간하면서 영유아, 초등학교, 중고등학교용으로 유∙초∙중등 교육과정 전체를 포괄할 수 있게 되었다. <아침독서신문>은 창간 이래로 지금까지 전국의 모든 초∙중∙고등학교와 공공∙민간도서관에 무료로 신문을 보냈다. 이는 학교와 교사에 대한 지원이 독서교육이 발전하는 데 가장 중요한 관건이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생매체인 <아침독서신문>을 믿어주고 꾸준히 광고로 후원한 출판사들이 있었기에 <아침독서신문>이 한 호도 빠짐없이 나올 수 있었다. 출판사의 대표와 담당자들에게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드린다.
<아침독서신문>이 우리 학교의 독서교육이 발전하는 데 약간의 역할이라도 감당할 수 있었다면 고마운 일이다. 많은 이들의 후의와 성원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부족한 면이 더 많으리라 생각한다. 앞으로도 부족한 점은 보완하며 더 좋은 신문을 만들도록 노력할 것을 다짐한다.
전국학교도서관담당교사모임의 이성희 대표가 “아침독서운동은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선한 연대”라고 표현한 것처럼 실로 무수히 많은 분들이 같은 꿈을 꾸고 함께 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아침독서운동을 하지 않았다면 전혀 알지 못했을 그 많은 분들을 만날 수 있었으니 이보다 더 큰 행운이 없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지난 5년을 돌이켜보면 한 발 한 발이 기적이었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결코 쉽다고는 할 수 없는 시간이었지만 많은 분들이 함께 했기에 너무나 행복했던 여정이었다. 한국의 아침독서운동이라는 길을 함께 만든 모든 분들께 마음을 모아 감사의 큰절을 올린다.
<출판저널 20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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