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뉴스 행간읽기
9월 2, 2010 by ad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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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백원근 재단법인 한국출판연구소 책임연구원 | 출판뉴스 행간읽기
해외 출판 지원, 중복사업 통합해야
“한국 관련 서적 출판 지원금 2만 달러로 상향”(<연합뉴스> 2010. 6. 28.)
한국국제교류재단이 1999년에 해외 출판사를 대상으로 시작해 2005년부터는 국내 출판사에도 확대 적용하는 한국 관련서의 해외 번역출판 지원금을 늘렸다는 내용이다. 문학 관련서는 제외한다고 하지만, 현재 한국문학번역원에서 전체 출판 분야에 대해 지원하는 사업과 대동소이한 방식이다. 제한된 국가 예산을 번역출판 지원 용도로 쓴다면 총괄 창구를 통해 그 효율을 높이는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양치기 소년’은 아마존닷컴인가 국내 언론인가
“미국 전자책 판매량, 종이책의 1.8배로 추월”(<조선일보> 2010. 7. 21.),
“미국인, 신간서적 e북으로 더 많이 봐”(<매일경제> 2010. 7. 21.),
“e북, 종이책 눌렀다”(<세계일보> 2010. 7. 21.) 등
아마존닷컴의 전자책 판매량이 종이책 판매량을 추월했다는 기사 내용이다. 미국 아마존닷컴의 2분기(4~6월)매출은 65억 7천만 달러로 전년 대비 41% 성장했는데, 특히 이 기간 동안 종이책 100권이 팔릴 때마다 전자책은 143권이 판매되어 전자책이 종이책을 앞질렀다는 것이다. 지난 6월의 경우에는 이 비율이 더욱 확대되어 종이책 100권이 팔릴 때 전자책은 180권이나 판매됨으로써 전자책의 비중이 갈수록 증대하고 있다고 한다. 이 정도면 ‘전자책 시대’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기사는 과연 얼마나 믿을 만한 것일까. 지난해 크리스마스 시즌에도 아마존닷컴은 자사의 전자책 단말기인 ‘킨들’을 통해 전자책이 종이책보다 더 많이 판매된 것처럼 발표했으나 사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국내 언론의 대부분은 ‘전자책이 종이책보다 더 많이 판매되었다’는 최초 아마존닷컴의 보도자료 발표는 인용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는 후속 기사는 보도하지 않았다. 즉 “아마존은 지난 크리스마스에 판매된 자사의 e북 콘텐츠들이 종이책 판매량을 능가했다고 발표했다가 판매된(다운로드된) e북의 60%가 무료라는 사실이 밝혀져 빈축을 사기도 했다”「( 아마존“2009년 최고 인기 상품은 킨들”」, 인터넷신문 <아이뉴스24>, 2009. 12. 31).
이번 발표에서는 무료 전자책을 제외했다고 하지만‘전자책이 종이책을 앞섰다’는 단정적 표현에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아마존닷컴은 킨들의 판매량에 대해 3년째 함구하고 있으며, 이번 발표에서도 정확한 종이책 및 전자책 판매량을 밝히지 않았다. 양장본(하드커버) 판매량을 전자책 판매량과의 비율로 환산하여 공표했을 뿐이다. 높은 성장률이 나타난 2분기 결산보고 당일의 아마존 주가가 폐장 후 거래에서 13%나 하락한 것은 그러한 불확실성을 반영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아마존닷컴이 미국 최대의 인터넷서점이라고는 하지만, 미국 출판에서 인터넷 판매 비중은 11%에 머물러 있고 도서 형태별로 양장본의 비중은 44% 수준이다. 즉 자사의 전용 단말기로 전자책 사업을 병행하고 있는 한 인터넷서점의 특수한 사례를 미국 전체 출판시장이 그런 것처럼 과장되게 보도한 국내 언론들의 태도는 안이하고 실망스럽다. 애플의 태블릿 PC인 ‘아이패드’판매량(6월 말 기준 약 327만 대)이 아마존닷컴의 ‘킨들’판매량(약 300만 대로 추정)을 넘어선 상황에서 나온 아마존닷컴의 전자책시장 선점 논리와 위기의식이 읽혀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또 한 가지 유심히 볼 부분은 현재 킨들 스토어에서 판매하는 유료 전자책 63만 종 중 51만여 종이 9.9달러 또는 그 이하의 가격으로 판매되고 있다는 점이다. 저가 양장본 평균가의 1/3 수준의 가격대이다. 이렇게 되면 전자책 판매량이 늘어난다고 해도 출판사의 수익률이 유지되는 것을 장담할 수 없다. 전자사전으로 인해 종이사전 업계가 시장 퇴출을 당한 선례를 답습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에 따른 미국 출판업계의 대응도 마련될 것으로 예견된다. 어떻든 현재의 전자책 시장을 여과 없이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시장 자료조차 변변히 없다는 점이야말로 현단계 전자책 시장의 미성숙을 보여주는 반증이라 하겠다. 이제 막 시작된 전자책의 걸음마를 두고, 마치 게임이 끝난 것처럼 보도하는 태도는 뉴스 이용자들에 대한 오만한 폭력이 아닐 수 없다.
심판대 오른 정부의 출판진흥책
“도서정가법 바꿔라 출판육성안 지켜라”(<동아일보> 2010. 7. 22.)
7월 21일 ‘정부의 안이하고 편향된 출판산업 정책을 개탄하는 출판∙서점계 11개 단체장 성명’이 발표되었다는 내용이다. 정부는 2007년 4월 출판진흥 5개년 계획이라 할 ‘출판지식산업 육성방안’을 발표한 이래로 대국민 발표로 약속했던 출판진흥기구 설립 등의 주요 정책 과제의 상당수를 차일피일 미루어 왔다. 디지털 환경을 맞아 전자책, 도서관 정책 등에서도 출판계와 상의하고 소통하기보다는 일방주의적인 정책 추진을 견지했다. 최근에는 신간에도 19% 할인(마일리지 포함)이 가능하도록 하는 출판문화산업진흥법 시행규칙을 출판계의 일치된 반대 입장에도 불구하고 강행시켰다. 뿔난 출판계는 대정부 비판 성명서를 냈고, 정부는 출판진흥기구 설립 TF구성과 법 개정을 통해 올 하반기에 진흥기구 설립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지 주시할 일이다.
발행 전 도서가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는 것은 정당한가
“무라카미 하루키 ‘1Q84’제3권, 나오기도 전에 난리”(<뉴시스> 2010. 7. 23.)
한국출판인회의가 7월 16~22일 대형 서점의 판매량 집계를 토대로 종합한 베스트셀러 목록을 소개한 기사이다. 여기에는 무라카미 하루키의《1Q84》(한국어판) 제3권이 6위에 랭크되어 있다. 발행 전이므로 예약 판매분을 반영한 것이다.
예약 판매도 판매임에는 분명하므로 각 서점들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리는 것에 대해서는 자체적인 판단 기준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발행되지도 않은 책을 선주문이 있었다고 하여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리는 것은 과도한 마케팅에 속한다. 사재기 행위의 근절을 위해 지난 6월 15일 문화체육관광부 관료와 출판∙서점계 단체장 및 주요 서점 대표들이 한 자리에 모여 발표한 <건전한 출판유통 정착 및 선진 독서문화 조성 협약식>에서 발표한 ‘베스트셀러 집계 가이드라인’세부 준칙에서도“예약도서 판매분은 발행 이후 집계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는 명시 규정이 상기된다. 원칙을 만들어 협약식까지 체결했으면 지키는 것이 상식이거늘, 한 달도 지나지 않아‘원칙은 원칙, 현실은 현실’이라 해버리면 지난번 협약식은 그저‘보도사진용’이었다는 말이 된다.
참신한 ‘서정시 읽는 도시’사업
“대구문화재단, 지역문화예술 기획지원사업 공모”(<연합뉴스> 2010. 7. 26.)
대구문화재단이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후원을 받아 올해 집중 지원하는 사업 중에 ‘서정시 읽는 도시’사업이 있다. 서정시 낭송회, 서정시집 출판 등 서정시 읽기를 장려하는 사업인데, 이를 주최할 단체를 공모한다는 내용이다.
문화예술, 독서, 출판 등과 관련된 행정기관이나 문화예술 단체들의 다양한 지원사업이 있었지만, 서정시를 화두로 내건 것은 이색적이면서도 참신하다. 대구 지역의 유서 깊은 문학 전통과도 부합하고 문학과 출판, 독서를 아우를 수 있는 기획이라는 점도 매력적이다. 그런데 홈페이지를 살펴보니 예산이 고작 5천만 원이다. 몇 종의 시집 출판과 수십 번의 낭송회를 개최할 정도의 예산이다. 이것으로‘서정시 읽는 도시’가 되기는 어렵겠지만, 그 단초나마 마련할 수 있다면 다행이리라.
‘독서문화진흥법’에 의해 매년 각 지방자치단체는 주민들을 위한 독서진흥 프로그램을 계획∙시행해야 한다. 하지만 그 수준이란 것이 천차만별이고 눈길을 끌 만한 변변한 프로그램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직장 독서 활성화’라는 독서진흥 기본계획상의 항목을, 대다수 지자체는 주민들의 직장 독서 프로그램이 아닌 공무원들의 직장(시∙군∙구청)을 위한 독서 관련 사업으로 오인하여 운영할 정도로 형편이 없다. 시민을 위한 개성 있고 호소력 있는 독서 프로그램의 발굴과 보급이 시급한 이유이다.
<출판저널 20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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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싣지 못한 2기 재판관들 인터뷰
9월 2, 2010 by ad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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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범준 | 《헌법재판소, 한국 현대사를 말하다》메이킹 노트 ⑥
06. 기록 3
책에 싣지 못한 2기 재판관들 인터뷰
1994년 9월에서 2000년 9월까지 김용준 소장이 있던 시절을 2기 재판소로 부른다. 1988년 개소한 헌법재판소 재판관의 임기가 6년이어서, 6년 단위로 재판소를 구분해서다. 2기 재판소는 김영삼 정부와 김대중 정부를 거치면서 복잡한 변화를 겪는다. 이런 정치 혼란 과정에서 완전 자립 상태가 아니던 재판소도 영향을 받아, 종종 흔들렸다. 이번 호《헌법재판소, 한국 현대사를 말하다》에서는 모두 싣지 못한 2기 재판관들 인터뷰를 소개한다.
조승형 재판관은 검사로 시작해 김대중 민주당 대표 비서실장을 거쳤다. 정치인 출신답게 판사로만 일했던 재판관들과는 시야가 달랐다. 두 차례 인터뷰했으며 장소는 서울 중구 태평로 코리아나 호텔과 이태원 캐피탈 호텔이었다. 정치활동 시절 자주 이용하던 곳이라고 했다.
헌재법 제정 당시 막판 협상 참여한 조승형 재판관
조 재판관은 재판관 시절 상당히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고, 헌재가 성립될 무렵 국회의원이어서 헌재 성립에 대해서도 소상히 알고 있었다. “헌재법 제정 당시 여야 막판 협상은, 여당인 민주정의당에서 강재섭 의원, 야3당 대표는 내가 했다. 그때 나는 헌법재판관 전원을 상임으로 하자고 주장했고, 강 의원은 상임재판관을 3명으로 주장했다. 양측 주장이 팽팽히 맞섰다. 이와 함께 당시 나는 탄핵 대상에 군 참모총장 검찰총장 등을 규정하여야한다고도 주장했다. 그래서 김대중 총재의 승낙을 받아 탄핵대상 조항을 양보할 테니 재판관 전원 상임화를 받아들이라고 민정당에 요구했다. 그러나 강 의원은 일보만 양보하여 상임 6명을 주장했다. 나는 위헌 결정 정족수인 6명만이라도 상임으로 하도록 하기 위해 합의해줬다. 재판관 전원을 상임으로 하자고 주장한 것은 헌재가 과거의 유명무실한 헌법위원회의 전철을 밟을까봐 서였다. 그래서 헌재법 개정안이 나올 때마다 나머지 3명 비상임재판관도 삼임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다행히 여당에서 그 개정안을 제출하기에 전적으로 합의한 것이다. 헌법재판소가 우려와는 달리 당당한 위상을 갖게 된 데는 재판관 상임 규정이 전적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사형제 합헌에 위헌 의견 내면서 갈등한 조 재판관
그리고 조승형 재판관은 1996년 11월 사형제도가 합헌 선고될 당시 위헌을 주장하면서도 고뇌가 많았다고 털어놨다. 당시 위헌 의견은 조승형∙김진우 재판관뿐이었고, 조승형 재판관은 결정문에 이렇게 적었었다.‘ 나는 지금까지 사형제도의 존폐에 관하여 오랫동안 좌고우면(左顧右眄)하여 왔으나 이제 이와 같은 태도를 버리고 이 시대에 우리 헌법재판관에게 지워진 소명에 따라 사형제도의 폐지를 주장하면서 다수의견을 반대하기에 이르렀다.’
조 재판관은 당시 집필 의도를 설명했다. “선고 앞두고 지존파 사건이 있었다. 사람 잡아다가 철판에 사람 태우고 그런 사건이었다. 그 사건을 보고 치를 떨었다. ‘이런 자들이 있는데, 내가 사형 폐지를 하나’라는 의심을 가졌다.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서. 과연 내가 잘하는 것인가 못하는 것인가 (고민했다). 1984년 민주화추진협의회를 창립한 뒤에 김대중 총재를 모시고 사형 폐지 운동에 서명한 일이 있다. (내가) 일관되게 사형제도 폐지에 대해 얘기했던 사람인데 헌재에 와서 사건을 다루게 됐다. 그런데 지존파 사건이 터지면서 마음이 흔들렸다. 1984년 서명한 이후로 행동의 일관성이 필요한 것인지가 문제였다. 그런 얘기다. 내 양심을 쓴 거다.”
법조인 출신의 김용준 재판관
2기 소장인 김용준 재판관은 불편한 몸을 이끌고 대법관과 재판소장에 오른 불굴의 법조인이다. 발언에 거침이 없고 주저하지 않는다. 어릴 때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가 불편하지만 테이블 위에 보란 듯 자주 올려놓았다. 그는 1996년 11월 사형 헌법소원에서 합헌 의견을 낸 것에 대해 설명했다. “지금도 사형제도는 유지돼야 한다고 본다. 루소는 ‘우리가 살인자에게 희생당하지 않으려면, 우리가 살인을 저지른 경우 사형대에 오르는 것에 동의해야 한다’고 했다. 사형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이라도 자신의 가족이 희생당했다고 생각하면 쉽지 않은 문제란 게 루소 얘기다. 일부에서는 종신형 제도를 두면 된다고도 한다. 하지만 과연 종신형 받은 사람이 죽을 때까지 감방에서 있을지 미지수다. 중간에 나오는 방법이 생긴다. 현실적으로 사형을 정한 범죄를 줄이고 사형 선고를 신중히 하는 게 낫다고 본다.”
동성동본 금혼에 위헌 선고한 황도연 재판관
황도연 재판관은 사법연수원장 출신으로 소탈한 성품으로 유명하다. 1997년 7월 선고된 동성동본 금혼사건을 주심재판관을 맡아 위헌을 선고했다. 필자는 보통 인터뷰에 앞서 질문지를 전달한다. 그러면 답변을 적고 인터뷰에 응하는 경우와, 적지 않고 인터뷰에 응하는 경우가 있다. 황도연 재판관은 깨알 같은 글씨로 모두 존댓말로 답변을 적어 인상적이었다. 애연가이기도 하다. 그에게 헌법의 정의를 물어봤다.“ 몇십 년 철학을 공부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에게 ‘철학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선뜻 대답하기는 좀 어려울 것입니다. 더구나 저처럼 헌법에 관한 소양과 연구가 부족한 사람에게는 너무나 어려운 질문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만용을 부려 굳이 물음에 대답한다면, 헌법이란 ‘국가와 그 구성원인 국민들 간의 기본약속’또는 ‘모든 국가기관과 국민들이 모두 함께 지켜야할 기본 지표’같은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따라서 헌법재판은 이를 지키지 못한 자에 대한 재판이고 그 담당자들이 헌법재판관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렇게 본다면, 헌법재판관의 책무는 실로 막중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영미법에 해박한 이영모 재판관
이영모 재판관은 헌재사무처장을 지내다 재판관이 됐다. 미국 연방대법원 판례를 인용하는 등 영미법에 해박하다. 지금도 일본과 미국에서 나오는 최선 법률 서적을 꾸준히 읽는다고 한다. 이 재판관은 2000년 4월 헌법재판소가 과외금지에 대해 위헌 결정했을 때, 합헌 의견을 냈다.
‘ 과열경쟁의 필연적 결과인 고액화 된 교습비용을 부담할 수 없는 가정의 자녀에게는 실질적인 교육기회의 균등한 보장이 이루어지지 않는 폐해를 낳기 십상이다. 학부모 각자가 경제력에 따라 자녀의 사교육에 대하여 어느 정도 부담을 할 것인가를 자율에 맡기는 것이 헌법정신에 부합한다는 다수의견은 그 부담의 정도를 감당할 수 없는 저소득층 가정의 자녀들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또한 교육결과의 격차가 학생 각자의 재능과 노력이 아니라 학부모가 가지는 경제력의 차이에 의하도록 하는 것은,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고 열린사회에 이르는 합리적인 변화와 공존의 장이 되어야 할 교육을 오히려 사회적 불평등을 고착시키고 이를 후대에까지 세습하는 수단으로 전락시키게 한다.’
이영모 재판관은 당시 합헌 의견과 관련해 판사이던 자신조차 과외비란 게 버겁단 취지로 설명했다.
“(과외금지) 때문에 내가 판사생활을 계속 하게 된 거다. (만약 과외금지가 없었다면) 애들 또 하나가 더 중학생이 되는 순간 변호사가 돼서 과외비를 대야했다.”
영미법을 공부한 계기도 설명했다.
“영국이나 미국에서는 권리가 있다고 얘기하려면 절차가 먼저 문제가 된다. 영미 법원에서는 절차적으로 구제할 수 없는 것은 권리에 포함하지 않았다. 절차적 기본권이 먼저 생기고 실체적인 기본권이 생긴다. 1968년인가 민복기 대법원장께서 취임한 다음에 미국에 1년간 연수를 보내는 제도가 생겼다. 하지만 나는 형편상 1년이나 나갈 형편이 안 됐다. 모두들 영미법 얘기를 하지 싶었다. 그래서 우리 법조계가 대륙법을 위주로 연구하던 때였지만 영미법에 관심을 가졌다. 한국어로 된 자료는 별로 없고 일본어 자료도 한계가 있었다. 직접 원서에 접근하지 않으면 안 됐다. 이후로 몇십 년 공부했다.”
<세계일보> <매일경제>에서 기자로 활동했고, 법조 전문 취재작가이다. 초기 재판소에 관한 자료들을 극적으로 찾아내어 오랫동안 논란이 많았던 5∙18 불기소 헌법소원 사건과 대통령 노무현 탄핵심판의 모든 과정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출판저널 20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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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싣지 못한 1기 재판관들 인터뷰
8월 9, 2010 by ad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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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범준《헌법재판소, 한국 현대사를 말하다》저자 | 《헌법재판소, 한국 현대사를 말하다》-메이킹 노트 ⑤
05. 기록 2
책에 싣지 못한 1기 재판관들 인터뷰
헌법재판소 재판관의 임기는 6년이다. 그래서 6년 단위로 재판소를 구분한다. 1기 재판소는 1988년 9월에서 1994년 9월까지 초대 재판관들이 있던 때를 가리킨다. 이렇게 2000년까지 2기와 2006년까지 3기를 거쳐, 현재는 이강국 소장이 이끄는 4기 재판소다. 《헌법재판소, 한국 현대사를 말하다》는 1∙2∙3기 재판소 역사를 집중적으로 다뤘다. 이 가운데 1기 재판관들을 가장 먼저 인터뷰했다. 1기 재판소 사건들은 20년 가까이 지나면서 기록이 사라지고 기억도 희미해져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루 한시가 다급했다. 이번 호에서는 책에는 모두 싣지 못한 1기 재판관들 인터뷰를 소개한다.
1∙2기에서 연임한 김문희 재판관은 2기 시절인 1996년 선고된 사형제 합헌 결정문 집필자다. 이에 앞서 1기 시절에 접수된 2개 사형 사건도 모두 다뤘다. 두 사건은 모두 각하됐다. 김 재판관은 사형제를 다룰 당시 재판소 상황을 공개했다.
사형제 합헌 결정문 집필한 김문희 재판관
“처음 접수된 사건은 청구인이 사형 집행 돼버렸다. 물론 집행은 됐더라도 향후 유사 사건을 위해 결정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본안 결정으로 갈 것인지 논의했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흘렀다. 그래서 굳이 오래된 건으로 하지 말고 새 사건 들어오면 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왜냐하면 가령 위헌이라도 나오면 헌재 너희들이 시간 끌어서 살릴 사람 죽은 것 아니냐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런 건은 집행정지 가처분을 구해놓고 해야 한다. 그리고 내가 합헌 결정문서 ‘한 나라의 문화가 고도로 발전하고 인지가 발달하여 평화롭고 안정된 사회가 실현되는 등 시대 상황이 바뀌어 생명을 빼앗는 사형이 가진 위하에 의한 범죄예방의 필요성이 거의 없게 된다거나 국민의 법 감정이 그렇다고 인식하는 시기에 이르게 되면 사형은 곧바로 폐지되어야 하며’라고 적었고, 이에 대해 어떤 학자가 ‘그런 날이 언제 오느냐. 뚱딴지 같은 소리 하지마라’는 식으로 말한 게 있다. 의미를 잘못 파악한 것이다. 그 의미는 환상적 세상을 얘기한 게 아니다. 남북과 같이 극한대립이 있는 사회에서 사형마저 없으면 한 간첩이 내려와서 몇백만 명을 죽일 수도 있는 문제란 점을 지적한 것이다. 하지만 그걸 결정문에 그대로 쓸 수는 없었다. 이런 배경을 깔고 말한 것이다. 적어도 우리사회가 극한 대립을 하고 있는 동안에는 사형을 완전 폐지하기는 어렵지 않냐 싶다.”
사형제는 2010년에 다시 합헌이 결정됐다.
이시윤 재판관은 김영삼 정부 시절 이회창 초대 감사원장 후임으로 옮기면서 퇴임했다. 그래서 헌법재판관 이후 감사원장 시절에 대한 소회도 인터뷰에서 밝혔다.
“국민과 언론은 이회창 선배가 닦아놓은 위상을 기대했다. 이회창 감사원장은 희대의 인물이고, 당시 정치의 중심도 감사원에 있었다. 하지만 나는 스타일이 다르다. 질풍과 노도를 끌고 가는 사람이 아니다. 게다가 상도동 가신들하고도 전혀 관계가 없었다. 아는 사람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 사람들은 알았다면 난처한 국면에서 지원을 받았을 수도 있었겠다. 그렇지만 만나지 않았다. 그 덕에 그들이 나한테 아무 것도 부탁하지 못했다. 결국 상도동에서 서포트를 받지 못했지만 괴로움도 없었다.”
이회창 전 감사원장은 현재 자유선진당 대표다.
간통 조항 악용될 소지 우려한 김양균 재판관
김양균 재판관은 유일한 검사 출신으로 1990년 선고된 간통조항 합헌 결정 당시 유일하게 처벌 자체가 위헌이라고 했다. 당시 자신의 생각을 상세히 설명했다.
“간통은 성경에도 하지 말라고 돼 있고 나 역시 간통이 좋다는 뜻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안 될 일은 전부 형벌로 가야하는 것은 아니란 얘기다. 예를 들어, 효를 형법으로 강요한다면 말이 안 되는 것이다. 형벌에 의해 강요되는 것이 무슨 효도냐. 형벌에 의해 강요된 정절이면 이미 정절이 아니다. 내가 오랜 검찰 생활하면서 있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1000건 가운데 법에 문제 되는 것은 1~2건이다. 그런데 문제가 되어서는 안 될 사람들이 걸린다. 참말로 얌전한 남자, 여자들이 걸려든다. 실무적으로 봤을 때도 문제가 많다. 가령 부모의 간통이 문제되면 피해자는 자녀가 된다. 특히 결혼 날 받아놓은 딸은 어떻게 되는 거냐. 날 받아놓고 어머니가 그런 일 있다면 혼사 깨지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 있던 사건인데, 모 고급공무원 부인이 수영장에서 수영코치와 탈선했다. 그런데 남편이 상당 고위직인데 덮고 용서를 했다. 근데 코치 부인이 문제 삼았다. 우리가 보기에는 다분히 짜고 돈 뜯으려는 것 아닌가 의심이 갔지만 어쨌든 사건화 됐다. 고위공직자는 돈을 엄청 물어줬다고 했다. 어차피 같은 피해자인데도 그렇다. 이렇게 악용이 된다.”
간통 조항은 2008년에 다시 합헌이 결정됐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추천한 변정수 재판관
변정수 재판관은 김대중 총재의 평민당 추천을 받았는데,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만난 과정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김대중 총재와는 전혀 몰랐다. 김대중 씨가 1985년 전두환 대통령 시절 가택 연금됐다. 나는 대한변협 인권위원으로서 DJ를 연금한 경찰서 경찰관 4명을 고발했다. 고발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군사정권 말기에 핍박이 심했다. 아무튼 가택연금 풀리고서 나를 가든 호텔 중식당으로 초대했다. 점심 대접 잘 받았다. 그리고 아들 홍일 씨를 시켜서 나한테 친필액자를 하나 만들어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헌재가 출범해서 야당에서도 재판관을 추천해야했다. 그런데 김대중 씨 주변 법조인 가운데 고등법원 부장급이 없었다. 한승헌∙ 이돈명 ∙ 홍성우 ∙ 조영래 변호사가 있었지만 고등부장을 한 사람은 없었다. 시킬만한 사람이 나 밖에는 없었다. 그 무렵 김대중 총재가 아침 식사에 이돈명 ∙ 한승헌 변호사를 동교동으로 불렀다고 한다. 명단을 내놓으면서 누가 적당하겠느냐고 물었고, 거기서들 날 추천했다고 들었다.”
취재에 의하면 1기 변정수 재판관을 직접 추천한 것은 이후 2기 재판관에 오르는 조승형 비서실장이다.
헌재의 정치적 성격 강조한 한병채 재판관
한병채 재판관은 4선 국회의원 출신답게 헌법재판소의 정치적인 성격을 다양하게 강조했다.“ 헌법재판소는 정확히 말하면 정치재판소다. 예를 들어, 미국에 연방최고재판소가 있다. 우리나라 대법원에서는 연방대법원이라고 번역하는데, 연방최고재판소가 맞다. 왜냐하면 미국에는 주마다 주대법원이 있다. 이곳 주대법원에서 일반 민∙형사 사건은 모두 마무리한다. 이와 달리 연방재판소는 연방헌법을 수호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독일 헌법재판소가 미국 연방재판소를 본뜬 것이다. 미국 연방재판소 재판관은 상당수가 정치인이다. 미국에선 국무장관 출신이 대통령으로 많이 갔고, 그 다음으로 연방재판소장으로 갔다.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의 경우 27대 대통령이자 10대 연방재판소장이다. 정치인이 재판소를 관장했기 때문에 미국 최고재판소의 기능이 제대로 된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민∙형사 사건이 아니고 소위 정치재판을 하는 곳이다. 이런 성격은 독일도 마찬가지다.”

1기 재판관 중 나이 가장 많았던 조규광 소장
1기 재판소 조규광 소장은 자신의 판사 시절을 들려줬다.
“내가 판사 생활하면서도 경기고에서 프랑스어, 중앙고에서 영어를 가르친 이유가 있다. (내가 외국어를 좀 했다). 나는 원래 철학 교수를 하려고 했다. 그러려면 동양에서는 한문, 서양에서 영어∙불어∙독일어를 알아야한다. 가능하면 라틴어나 희랍어도 해야 한다. 그래서 영어∙프랑스어를 일본에서 학교 다닐 때 배웠고, 독일어는 순전히 독학으로 했다. 그리고 그 무렵 법원 판사 월급이 쌀 20킬로쯤이다. 법관은 영업을 하면 안 된다는 거 알지만 먹고 살아야하는데 어떡하나. 판사가 와이로(賄賂∙뇌물) 먹을 수는 없지 않냐. 그래서 어떤 재주 좋은 사람은 경찰국에 얘기해서 시발이라고 미국 지프차 불하한 거 두드려서 만든 택시를 돌리는 분도 계셨다. 내 경우는 마침 경기고를 나왔는데, 경기가 부산에서 피난에서 올라온 뒤에도 선생님들이 다 안 올라왔다. 그래서 나한테 자리가 났다. 또 명동에 가톨릭계 학교가 있었다. 거기서 프랑스어 하는 분이 나더러 가르칠 수 있겠냐고 물었다. 책 읽고 하는 정도는 된다고 해서 시작하게 됐다.”
1기 재판관 가운데 나이가 가장 많았던 조규광 소장은 올해 85세, 가장 적었던 김문희 재판관은 74세다.
이범준
<세계일보> <매일경제>에서 기자로 활동했고, 법조 전문 취재작가이다. 초기 재판소에 관한 자료들을 극적으로 찾아내어 오랫동안 논란이 많았던 5∙18 불기소 헌법소원 사건과 대통령 노무현 탄핵심판의 모든 과정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출판저널 20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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