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가치를 예술주의적 관점에서 규정한‘김환태’
글.권영민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문학평론가 / 작가파일(탄생 100주년 작가 시리즈 ③)
1930년대 식민지 현실 문제 주목한 비평가
김환태의 비평가적 위상은 1930년대의 문학적 현실을 떠나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김환태가 주장했던 문학의 순수 문제가 문학과 예술에 대한 비평적 관심을 예술적 자율성과 그 가치의 옹호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그러나 1930년대 문학의 전체적인 흐름을 놓고 생각하지 않고서는 이 새로운 비평적 담론의 성격을 제대로 규정할 수 없을 것이다.
문학은 개성의 산물임을 강조한 김환태
김환태의 비평 활동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한 1930년대 중반은 한국문학이 일본 군국주의의 사상 탄압에 대응하면서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던 시기이다. 이 시기의 문학은 흔히 조선프로예맹의 해체(1935)라는 역사적 사건을 중심으로 그 경향의 변화를 설명하게 된다. 조선 프로예맹은 성장하는 무산계급의 이념에 따라 부르주아 문학의 붕괴를 역사적 필연으로 치부했던 계급문학론의 조직적 기반이다. 계급문학론자들은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을 중심으로 계급 이데올로기의 문학적 실천을 요구한 바 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무산계급의 혁명을 위한 전위적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다. 계급문학운동은 일본 식민지 지배권력에 대한 민족적 저항 자체를 계급적 차원에서 규정하고 있으며, 민족사회운동 자체를 계급적 투쟁에 의거하여 논의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들의 주장 속에는 정치이념과 예술적 사상의 통합을 위한 기도와 구상이 숨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김환태는 이같은 계급문단의 이념적 요구와 조직적 실천을 모두 거부하였다는 점에서 그 문단적 지위가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김환태가 문학에서 계급적 이데올로기를 부정하고 그 미적가치를 강조하는 유별난 선택을 스스로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은 식민지 현실의 문제성을 외면하기 위한 포즈가 아니다. 김환태는 문학의 순수를 말하기 전에 오히려 문학이 개성의 산물임을 강조하고자 하였고, 문학의 자율성을 논하면서 문학의 미적 자율성을 간섭하는 식민지 현실의 문제성에 주목하였던 것이다.
김환태(金煥泰, 1909.11.29~1944.5.26)
1930년대 후반에 인상주의 비평으로 문학의 독립성과 순수성을 주장한 문화평론가이다. 전라북도 무주에서 태어나 보성고보(普成高普)와 일본 규슈제대(九州帝大)를 졸업하였다. 졸업 이후 황해도 재령의 명신중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다 1940년 4월 서울무학여고로 자리를 옮겼다. 이때 일제의 창씨제도 시행과 황국식민화가 시행되어 많은 문인들과 함께 붓을 꺾었다. 이후 낮에는 교단에 서고 밤에는 법률서적들을 놓고 고시준비에 열중했다. 그러던 중 과로 때문에 폐 건강이 악화되어 1944년 광복을 1년 앞두고 서른여섯이라는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사진제공_문학사상사)
문학의 미적 자율성에 대한 인식
김환태의 비평적 태도는《시문학》(1930), 《시인부락》(1937) 등을 비롯한 여러 문학지의 발간 과정과 <구인회>(1933)와 같은 동인 조직의 형성 배경 등에 어우러지면서 하나의 새로운 문학적 경향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더구나 계급문단의 붕괴로 인하여 집단적인 조직 활동이 불가능해지자, 집단적 이념 추구의 경향이 사라지고 문학의 리얼리즘적 경향이 퇴조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김환태는 ‘구인회’그룹에 참여하면서 집단적 이념보다 개인적 정서를 중시하기 시작한 소그룹 중심 문학 활동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당시 문단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이 문단의 변화는 흔히 모더니즘 문학의 등장이라는 명제로 그 역사적 성격이 규정되고 있다. 김환태는 이 새로운 문단적 경향의 한복판에 서서 집단주의적 계급 논리를 거부하고 역사 발전에 대한 과도한 전망 자체를 부인하면서 새로운 비평의 활로를 찾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 변화의 과정 속에서 한국 사회의 식민주의적 근대성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통해 근대적 주체의 확립이라는 비평적 담론이 새로운 지평을 확보하게 되었으며, 문학의 미적 자율성에 대한 인식을 구체적인 문학 작품을 통해 확인하기 시작하였다.

<이하 내용은 출판저널 10월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